제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 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나에게 사진은 순간과 순간의 영원성을 포착하는, 늘 세심한 눈으로부터 오는 자연스러운 충동이다. 드로잉은 우리의 의식이 순간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섬세한 필적으로 구현해낸다. 사진은, 성찰을 드로잉하는 순간적인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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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든 철학자,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그가 7년 전 오늘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결정적 순간’을 통해 다큐멘터리 사진미학을 확립한 그는 ‘취미를 하나의 예술 형태로’ 정착시킨 포토저널리즘의 선구자였다.
1908년 8월22일 프랑스 파리 인근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브레송은 대학입학자격 시험인 바칼로레아에 연거푸 낙방한 이후 초현실주의 이론가인 앙드레 브르통 등과 교유하면서 예술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앙드레 로트에게 그림 지도를 받은 그가 카메라를 처음 만진 것은 23세 때. 아프리카의 아이보리 코스트로 건너가 1년간 체류하면서 이를 사진으로 기록했다. 유럽으로 돌아온 이듬해 독일 라이카사의 35㎜ 카메라를 구입했다. 젊은 시절 한때 영화에 눈을 돌리기도 했지만 보도사진을 찍기로 결심한 이후 그는 1947년 로버트 카파, 데이비드 세이무어와 함께 보도사진 에이전시인 매그넘 포토스를 창립했다. 마하트마 간디의 장례식, 스페인 내전, 파리 해방, 국민당의 몰락과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 인도네시아의 독립, 영국왕 조지 6세의 대관식 등 세기의 순간들이 그의 필름에 담겼다.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은 휴대와 촬영이 간편한 35㎜ 카메라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브레송은 카메라를 평생 자신의 제2의 눈이라 여겼다. “나는 라이카를 발견했다. 그것은 내 눈의 연장(延長)이 되어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마치 현장범을 체포하는 것처럼 길에서 생생한 사진들을 찍기 위해 나는 바짝 긴장한 채로 하루 종일 걸어 다니곤 했다. 무엇보다도 돌발하는 장면의 정수를 단 하나의 이미지 속에 포착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오랜 관찰과 직관적인 판단이 필요하다. ‘결정적 순간’은 52년 발간한 사진집 <재빠른 이미지>에 본인이 쓴 서문. 그는 여기서 어떤 상황이나 인물의 진수라 할 만한 순간을 직관적으로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부 평론가들은 그의 사진을 ‘스냅사진’이라고 폄훼하기도 했지만, ‘결정적 순간’론은 이후 반세기 동안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지침이 됐다.
피사체가 의식하지 않는 사진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한 그는 라이카 카메라에 표준렌즈만을 물렸고 카메라의 은도금 부분마저도 검정테이프로 가렸다. 그는 사진가는 암실이 아니라 카메라를 통해 이미지를 완벽하게 구성하고 편집해야 한다고 생각해 인화 후 보정이나 트리밍 등에 반대했고 심지어 사진에 제목도 달지 않았다.
“나에게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다른 시각적 표현 수단들과 분리될 수 없는 이해 수단이다.” 사진을 찍는 행위 자체가 외침과 해방의 방식이자 삶의 방식이라고 말했던 브레송은 그때까지 회화와 새로이 등장했던 예술장르인 영화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사진의 지위를 예술로 끌어올렸다.
2004년 생을 마감한 그를 네이버 지식사전에서 만나봤습니다..
Henri Cartier Bresson 1908~2004
(네이버 님들아.. 타계한 년도는 좀 적으시죠?)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1908년 프랑스 샹틀루에서 태어났다. 1931년 경 우연히 사진을 배우게 되어 아프리카 여행에서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후 프랑스 전역과 이태리,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본격적인 사진제작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사진 못지않게 영화에도 큰 흥미를 가져 1936부터 1939년까지 영화제작에 몰두하는데, 1937년에는 내란중인 스페인에 가서 사진도 찍으면서, 공화국 병원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생명의 승리>를 만들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군의 영화사진부대에 육군하사로 복무하던 카르티에 브레송은 독일군의 포로가 된다. 세 번의 시도 끝에 극적으로 탈출하여 파리에 돌아온 그는 레지스탕스에 가담하여 활동하면서 나치 점령과 파리 해방의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카르티에 브레송이 세계 사진의 중심인물로 떠오른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부터이다. 그는 먼저 1947년에 절친한 친구들인 로버트 카파, 데이비드 시무어, 조지 로저 등과 함께 취리히에서 사진통신사 <매그넘(Magnum)>을 결성하였다.
1952년엔 유명한 사진집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을 출간하여 세계 사진계를 '결정적 사진'의 열풍에 빠뜨렸다. 이후 1970년대 후반까지 보도사진가로 세계 전역을 다니면서 독특한 사진세계를 선보였다. 또 알베르 카뮈와 피카소, 사르트르, 자코메티 등 3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문화예술인과 정치인의 초상을 찍기도 하였다.
그러나 친구 데이빗 시모어가 취재도중 살해되자 사진에서 멀어지기 시작했으며, 1966년에는 자신이 창립한 매그넘과도 결별하고, 1974년부터는 그림에만 전념하였으며, 현재 파리에서 살고 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늘 카메라를 삶과 마주한 눈의 연장(延長)으로 생각했으며, 사진을 일기이자 삶의 메모라고 생각했다.
그의 사진적 철학이 내재된 <결정적 순간>이란 삶의 한순간을 예리하게 관통하는 의식과 인식의 상작용이며, 사진가와 대상이 찰나적으로 하나가 되는 생의 순간이다. 내용과 구성이 가장 조화로운 순간, 절제된 구성과 기하학적 구도로 귀결되는 최상의 순간을 발견하여 타이밍에 맞추어 이것을 촬영하는 것이다.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은 이 용어가 생긴 이래 수많은 추종자를 낳았고 오늘날에 와서는 하나의 사진예술의 미학으로 자리잡았다.
일각에선 그런 소리를 하곤 합니다.. '그 당시나 되니까 브레송 브레송하지.. 지금은 카메라, 렌즈도 발달해서 이젠..뭐..'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당시 그런 풍경에서 그런 상황에서 그런 사진들을 담아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는 거고 시작점이기에 존경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순간에 시선을 두지 못하는 작가들은 넘치고 넘칩니다.. 기술의 문제가 아닌 감성의 문제..
50%의 감성과 40%의 노력 그리고 10%의 지식으로 이루어진 이 고도의 사진들을 현시대에 찍을 수 있다면 찍어보시지요.. 물론 앞서 말한 그 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의 미묘한 차이를 극복하실 수 있다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