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Sin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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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기간이 찾아왔다. 매년 12월은 1년치 회고를 한다. 아직 12월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12월에 내 커리어에 커다란 변화가 또 한번 있었기에 회고를 조금 빠르게 해보려고 한다. (사실 연말에는 아이 둘이 방학이니 집에서 차분하게 글쓰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나는 초벌 작성을 해놓고 글을 쓰는 성향이 아니다보니 긴 호흡의 리마인드가 필요한 글을 쓰기가 쉬운 성격이 아니다. 예전에도 35년이 넘는 회고를 하려고 작은 책을 인쇄한 적이 있는데 이때도 참 어려웠다. 그래도 차분하게 써봐야겠다.

 

나는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었다. 속독법을 오랜 기간 배웠던 덕일 수도 있지만 장난감이 많지 않았던 내게 동네 서점에서 엄마 기다리며 읽던 책이 유일한 놀이었기도 했다. 그러다 일과 공부를 병행하고 육아에 허덕이다보니 점점 책보다 정보를 탐색하고 디지털 출력물에 집중하는 것으로 독서 시간이 대체되었다. 이 패턴이 내게 도움이 되지 않고 정보의 주제가 한정적으로 변하는 것을 느낀 뒤로 책상 앞에 독서대를 두고 샌드위치를 먹든 잠시 머리를 식힐 때이든 어떻게든 책을 읽으려는 습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욕심내지 않고 하루 한 페이지만이라도 읽으면 1년에 한권은 읽겠지라는 생각이었다. 

 

2022년에는 오랜 기간 독서대를 차지했던 팩트풀니스를 마저 읽었고, 규칙 없음과 절대 성공하지 못할 거야, 사용자 스토리 맵 만들기, 애자일 회고, 챌린저 세일, 세일즈 성장 무한대의 공식을 읽었다. 사놓고 아직 읽지 못한 책도 있고, 지금 읽고 있는 책도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재밌고 감명 깊었던 책은 절대 성공하지 못할 거야이다. 특히 구조조정을 하는 장면은 눈물이 맺힐 만큼 감정이입이 많이 됐었는데, 내게도 현실이 되어 펼쳐졌었다. 2021년에 열었던 IR Round가 2022년 초 리드 투자자의 보류 선언으로 잠정 중단되었고 회사도 투자 실패와 현금 유동성을 확보하지 못한 대책 마련이 필요했었다. 당장 사업을 더 끌어오는 것보다 문제가 됐던 것은 비용 구조적인 문제가 더 컸다. 런웨이가 고객의 입금 시점에 따라 인터벌이 컸고, 주문이 들어와도 잉여자원이 생산에 투입되기 전까지 계속 비용을 소비하다보니 생산효율성을 아무리 높여도 기본적인 고정비가 높았다. 당시에는 회사에서는 인건비는 고정비가 아닌 것처럼 여겨졌는데, 내 눈에는 고정비였다.

 

이 과정에서 꽤나 높은 목소리로 언쟁이 오고가기도 하고, 솔루션을 찾아보려고 다들 머리를 싸맸지만 결과론적으로 답이 없었다. 아무리 시뮬레이션을 돌려도 당장 대형 사업을 수주하더라도 이미 높아진 번레이트를 지금 당장 낮추진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외부 시장 동향이 나빠질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고, 리드 투자자였던 금융회사의 움직임을 보고 글로벌 투자 시장을 보니 제법 추운 겨울이 올 것이라는 예측을 우리도 할 수 있었다. 구조조정에 대한 안건이 조용히 나왔을 때 이에 반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는 나는 의사결정에 개입하지 않았다. 구조조정의 대상자에 나도 후보자로 대상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Co-founder 끼리 결정하기를 권했다. 일주일만에 진행된 과정에서 나를 제외하고도 제법 많은 인원들이 구조조정 대상자가 되었고 권고사직이 시작됐다. 남은 사람들이 더 전투적으로 다시 일으켜서 이들을 다시 모셔오자고 다짐했는데 구조조정 과정에서 잡음이 생겨났다. 통보하는 과정에서 마음의 부담을 느꼈던 것인지 거두절미하고 이야기를 전달해버리는 바람에 대상자였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쾌감을 표현했다. 이렇게 되니 남아있는 사람들의 충격과 상처는 더 오래 갈 수 밖에 없었고 회사는 신뢰를 잃어갔다.

 

늘 하던대로 6시에 저녁을 먹지 않고 베란다에 꾸민 홈짐에 들어가서 스트랩을 착용하고 있는데 전화가 한통 왔다. 대표였다. 여러 고민들을 털어놓았고, 앞으로의 제품 방향성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싶다는 전화였다. 약간 고민의 결이 달랐다. 나는 우리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지만 신규 진입자가 많아지면서 우리의 포지션이 가치를 잃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전달하며 우리가 이번 위기를 겪으며 내가 배운 가장 큰 교훈은 PMF에서 더 중심에 놓고 생각해야 하는 것은 제품이 아니라 마켓이라는 것이고, 더 정확하게는 마켓의 문제나 불편함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시장에서 가장 큰 문제는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의 구매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점과 그 과정에서 제품이 혁신해주고 있는 것은 너무 미미하고 매력적이지 않다고 했다. 지금의 제품을 다듬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질적인 문제와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고민해보자고 했다. 홈짐에 선채로 꽤 오랜 시간 통화하며 대표는 내 의견에 동의하며 내가 말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도전해보자고 했다. 그리고 대표는 자신이 갖고 있던 이상적 제품에 대해 PO인 내가 바잉되지 않으니 직접 해보겠다고 선언했다. 일명 양동작전이다.

 

시작한지 2주만에 나는 시장 조사를 통해 만들어진 가격표만 들고 시장의 반응을 살피러 다니고 고객 사전 예약을 받고 다녔다. 3일 만에 50개의 고객사에서 명함과 연락처를 주며 사용하겠다고 약속했다. 허수도 있을테니 다음에는 대면 세일즈가 아닌 온라인에서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우피를 이용해서 랜딩페이지를 제작하고 페이스북에 5만원 정도 되는 금액을 충전해서 광고를 돌렸다. 역시 B2B는 온라인에서 먹히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즈음 10개 정도의 기업이 사전 예약을 완료했다. 무료 요금제가 마중물이 되었을 수 있으니 실제 유료 고객 전환율이 나올 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제는 제품을 만들어야 했다.

 

완벽한 제품보단 완성된 제품을, 완성된 제품보다는 우리가 지금 가진 가설을 검증할 최소한의 제품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정책을 만들고 회원체계를 만들고 고객이 유입되서 보게될 기본적인 페이지 구성을 마친 뒤에 회원 전환율을 지켜보았고,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핵심 기능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2주동안 10개의 오가닉 유입이 있었고 회원 전환까지 100% 완료되었다. 이제 확신을 갖고 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기존에 있었던 시장에 대한 가설과 추측들을 모두 정리하여 하나씩 점검했고, 모든 실험 결과 단정하고 있었던 대부분의 추측이 참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근데 이 과정에서 네카라쿠배 중에서 3개 이상의 기업이 유입됐고 대형 게임회사부터 제조업, 중소기업, 교육기관까지 70개가 넘는 기업들이 유입되었고 수많은 데이터와 고객과의 대면 미팅에서 알게된 단 하나의 문제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문제만 해결되면 구매할 것이라는 생각에 빠르게 프로토타입을 만들어서 배포했고 바로 진입하여 사용하는 고객을 만날 수 있었다. PMF를 찾는 경험을 드디어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이다.

 

하지만 이 설렘도 얼마 가지 않았다. 고객이 원했던 기능을 넣기 위해서는 기존에 만들었던 제품들의 리팩토링과 신규 개발이 필요했고, 고객이 원하는 기간에 맞추려면 모든 제품팀이 이것 하나에만 몰입해야 했다. 단 하나의 스쿼드가 이 많은 기능들을 소화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회사에 챌린지 해보았지만 회사는 대표가 진행 중인 프로젝트(양동작전)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3개월 동안 3번의 타운홀 미팅에서 발표를 자원했고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떤 기대효과가 있는지 설득했다. 동료들이 움직여도 회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내가 설득 당할 차례라고 생각하고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을 듣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나의 많은 동력들이 제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구성원 중 핵심 자원들이 이탈하기 시작하며 내가 웹 개발을 해야 하는 상황까지 가고야 말았다.

 

아마 이때부터 였던 것 같다. 내 지난 커리어를 돌아보며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하는지, 다음엔 어떤 선택지를 가질 수 있는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좁혀보니 나는 지금 회사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 장애물이 될 것이 분명했다. 회사가 집중하고 있는 그 프로젝트는 2년 가까이 단 하나의 결과도 만들지 못했었다. 난 지금의 진행 방식에 동의하지 못했을 것이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지금 회사가 구조조정까지 진행하며 한 사람의 리더에 집중된 권한과 책임을 원했기에 문화적으로도 맞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도 사실 어느 회사를 가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순응할 수 있었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나에 대한 문제였다. 이 고민의 과정에서 내 포트폴리오를 보니 정확히 10년 동안 사회생활을 했다. 이 10년을 시작하며 10년 동안은 공부와 시장에서 경험하고자 했던 각오를 했던 만큼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이 뒤의 10년은 임팩트 있는 일을 하고자 했던 계획이 불현듯 떠올랐다. 더 재밌고 의미있는 일, 내 마음이 동하는 일이어야 했다. 이런 생각이 한번 스치자 고민은 심플해졌다. 

 

그리고 또 다시 전화가 왔다. 이번엔 COO였다. 회사 경영난으로 내년 연봉협상에서 임금 지급 방식을 제안하는 내용이었다. 길게 고민하지 않고 퇴사를 언급했다. 그리고 위의 이야기들을 최대한 즉흥적으로 정리하며 이야기를 했고 오프보딩 문서를 작성하고 있겠다고 하고 통화를 마쳤다. 오프보딩 문서에는 인수인계 문서를 포함해 그동안 작성했던 코드와 주요 업무 내용들이 포함됐다. 아무래도 모든 업무를 공유하는 습관이 있어서 그런지 정리할 업무 내용이 많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시 문서의 초반부로 돌아가 부검메일을 작성했다.

 

"최대한 빠른게 좋겠죠?"

"네 갑작스러웠지만 말의 무게를 알기에, 회사와 남아있는 사람들이 편한 방식으로 해주시면 좋겠어요. 저 개인적으로는 이제 집중해서 이직을 준비했으면 하기에 빠를수록 좋아요"

 

퇴사가 확정이 된 뒤로는 사실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마침 업무도 마무리되고 있었기에 내가 다시 벌리지만 않으면 됐다. 빠르게 업무가 정리되고 다른 회사와 인터뷰를 시작했다. 투자자에게 콜드콜 하듯 일단 이력서는 리스트업된 기업들 대부분에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터뷰를 봤으면 하는 기업들과 만남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도 인상 깊었던 회사에서 합격 소식이 들려왔다. 오퍼도 하루 이틀만에 확정됐다. 이 과정은 다음 글에서 천천히 작성해봐야겠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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