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싫어~ 엄마
어느 날 집 근처 영어 교습소에 차량들이 줄지어 오고 가고 명절까지도 많은 가족들이 오가며 한숨 쉬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됐다. 들어가기 싫다고 떼쓰고 우는 아이부터 즐겁게 웃으며 선생님한테 밝게 인사하며 들어가는 아이까지, 이곳을 드나드는 아이들의 표정과 얼굴만큼 다양한 감정이 스쳤다.
나는 대치키즈로 자랐고, 연어족이 되어 다시 대한민국 최고의 학군지로 불리는 이곳에서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공부를 잘했던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인 법이라, 나는 한 번도 스스로 공부를 잘한다고 느낀 적이 없다. 오히려 강제성이 느껴지면 곧바로 반발하는 성향이었기에, 공부에 대한 압박이 사라졌을 때 오히려 좋은 성과를 냈다. 특별한 꿈이 있거나 대단한 직업을 목표로 한 것도 아니었지만, 30대까지도 일과 병행하며 학습을 지속했다. 공부가 재미있어진 이유는 배운 것들을 내 일에 적용하면서 성취감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아이도 이 성취감을 느낄 수 있길 바랐다. 그래서 스스로 공부하고자 하는 환경에서, 성취감을 더 크게 느낄 수 있는 곳을 찾았고, 그 선택지가 대치동이었다.
대치동은 아이들이 성장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갖춘 곳이다. 아이 교육에 대한 열정이 어느 정도가 적절한지는 개인의 교육관과 가치관의 차이이므로 논쟁할 문제는 아니다. 마치 더미의 역설 같지 않은가? 나는 단지 확률적으로 더 좋은 어른이 될 가능성이 높은 환경을 선택했을 뿐이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나는 다수의 경우를 믿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대치동으로 돌아왔다. 아이가 더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라면서 말이다.
대치동에서 자라는게 행복해요?
대치동에서의 내 행복이 절대적이었는지 묻는다면, 단순히 당시의 경험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다른 지역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보면서 양가적인 감정을 느꼈고, 고민 끝에 선택한 것이 대치동이었다. 누군가는 대치동의 과열된 교육열이 아이들에게 학대와 같다고 말한다. 나 역시 다른 지역에서 학교를 마친 후 자유롭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그들의 웃음 속에서 행복을 간접 경험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공부를 제법 잘하던 아이들이 서울의 명문 대학에 진학하고, 좋은 회사에 들어가 능동적인 삶을 사는 것도 보았다. 그들의 삶은 분명 이상적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 아이들이 대치동의 교육을 받았다면 더 잘했을까? 결과는 같았을 수도, 달랐을 수도 있다. 우리는 단 한 번뿐인 삶을 실험할 수 없기에, 예상과 추측 속에서 고민하고 선택해야 한다.
대치동 학원가를 다니며 나는 특별한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날 직장 동료가 이곳을 지나며 마치 기시감을 느낀다는 듯 "징그럽다"는 표현을 썼을 때, 그가 느낀 불편함이 낯설게 다가왔다. 내가 자란 환경이기에 자연스럽던 것들이, 그에게는 불행을 상징하는 요소로 보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과 불행은 직접 경험을 통해서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결국 상상할 수 있는 것과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공부가 자연스럽고 즐거운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기로 했다. 내게 대치동은 좋은 추억이었고, 행복한 삶을 위한 선택지였다. 돌아보면, 하기 싫은 공부가 괴로웠을 뿐, 그 시절의 나는 행복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 기억들은 따뜻하다.
행복은 뭔가 얻으려고 가는 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길 자체가 행복이다.
나에게 대치동은 길 그 자체였다. 그 길을 행복으로 볼 것인지, 힘든 여정으로 받아들일 것인지는 오롯이 내 선택이었다. 물론 정신적 안정과 편안함이 행복의 기준이라면, 대치동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불행의 시작일 수도 있다.
어머니, 게ㅇㅇ 갈 수 있어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보자. 4세 고시, 7세 고시, 황소 고시로 이어지는 대치키즈의 로드맵에서 희망과 공포를 섞은 말은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그 부모가 사회적으로 명망 높은 사람이라도 이 한 마디는 자유로운 평원을 달리던 말을 순식간에 경주마로 바꿔버린다. 눈이 가려진 채 목적지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가 된 가장 큰 이유는 목표가 ㅇㅇㅇ에 들어가기라는 명확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학원이 존재하는 이유가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오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애초에 별다른 노력을 크게 들이지 않아도 들어와서 자신의 재능을 폭발적으로 성장시키는 곳에 억지로 만들어진 아이가 들어가면 얻을 수 있는 강점은 피어그룹과 높은 수준의 교육일 것이다. 그리고 그 피어 그룹에 계속 소속되고 지속적으로 교육에 따라가려면 4세 고시하며 했던 노력을 7세 고시까지도 쉼 없이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영어에 있어서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것이다. 영어 하나만 All-in 해도 될까 말까 한데, 영어 달리는 아이들은 수학도 국어도 달린다. 어떻게 이걸 다 하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해내고 있다. 어떤 아이는 숙제를 포기하며 쫓아가고, 어떤 아이는 그중 절반만 쫓기도, 어떤 아이는 그냥 무시하고 영어만 파는 경우도 있다. 결과적으로 피어 그룹을 리딩하는, 즉 학원의 목적에 알맞은 아이들은 충분히 다른 걸 하면서도 다 해낼 수 있는 여유가 있는 반면 만들어진 재능으로 학원에 들어간 아이들은 더 숨차게 쫓아다녀야 한다.
이런 일이 왜 생겼는지 다시 돌아보자. 언어에 특별한 재능을 가진 아이들에게 그 재능에 알맞은 교육을 제공하는 곳이 있다. 그래서 시험 난이도를 높게 하고 그런 아이들이 모여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 가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쏟아서 들어간 아이가 있다. 이 아이의 재능은 무엇일까? 부모의 정보력과 재능을 대체할 만한 자산과 시간을 보유한 것이 아이의 재능일까? 바꿀 수 있다면 분명 훌륭한 투자이지만 기회비용이 과연 부모의 자산과 시간일까? 아이의 재능을 발굴할 기회와 시간도 기회비용이지 않을까? 근데 시작하고 나면 생각나는 건 준비하는 데에 들인 매몰비용만 떠오른다. 시간 당 30만 원, 40만 원.. 이미 들어간 돈이 있고, 아이와 내 주변 사회 평판(Reputation)이 손상되는 게 자꾸 생각난다. 무슨 대단한 카르텔도 아닌데 계속 소속되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이미 악순환의 고리에 들어간 상태에서 부끄러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으니 재능이 없는 아이의 시간과 노력을 써서 재능으로 바꾸어야만 한다. 나는 대단한 선비라 그런 경험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나 역시 그러했다. 오히려 나는 그 사회에 속하지 않은 아빠이기 때문에 조금 덜 느꼈기 때문에 온전히 내 아이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지금 나의 아이가 갈 수 있는 한계(capacity) 안에서 선택하고 있다. 우리 인생도 그렇듯 아이의 인생도 그렇게 하는 게 늘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은 교육열이 없다는 거예요?
나의 교육관은 여전히 공부를 능동적으로 재밌게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공부의 목적은 더 좋은 어른이 되는 것이고, 단기적으로는 어른이 되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고를 수 있도록 하게 해주고 싶다. 어쩌다 보니 운이 좋게도 난 내가 즐겁고 재밌어 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선택지가 많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수도 없이 꿈(장래희망)이 바뀌었던 나는 그 바뀌는 과정에서 내 한계도 맛보아야 했고,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는 일들도 많았다. 그때마다 어릴 적 피부로 경험했던 사회에서의 나의 위치는 정확한 메타인지를 할 수 있도록 도왔고, 어려움이 어려움보다는 도전하면 넘을 수 있는 수준으로 느껴졌다. 환경에 어떻게 적응하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교육열이 대치동의 엄마들만큼 넘치는 아빠이다. 하지만 그 교육의 방향이 입시에만 포커스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일부 대치동 엄마들에 대해 외부에서 표현하는 교육열과 다를 수도 있다. 그리고 난 이 부분에서도 대치동의 엄마들도 나와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다 보니 경주마가 된 엄마, 나의 부족함을 아이에게 투영하는 엄마가 어느 순간 되어 있었을 뿐 그 욕심이 교육열이라면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나보다 무식한 사람들이었다면 그만한 자산과 노력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대치동은 좋은 곳이지만 대치동의 자신의 중심을 잘 지켜야 한다. 좋은 교육 전문가임을 자청하며 가치관을 맞추어 가는 과정과 상담이 아닌 학부모의 지갑을 열게 하기 위한 상담 과정은 내가 사회에서 자주 보던 세일즈이고, 교육 전문가보다는 세일즈 전문가처럼 보였다. 경청없는 설득은 그렇다. 극단적인 과부하는 심각한 손상을 초래한다. 점진적 과부하와 회복을 하려면 케이스별로 자세히 살피고 그 과정에서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자세히 보아야 한다. 그래야 케이스에 대한 이해가 생기고 적절한 처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적당한 손상과 회복을 통해 성장할 때 적당함은 부모만 알 수 있고 정의할 수 있다. 그래서 아이와 부모가 걷는 길인 인생 자체가 행복이어야 하고 그 행복이 잘 정의되어야 한다. 행복은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희망 고문과 공포심에 의해서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 내가 나쁜 건가요?
그 누구도 나쁘지 않다. 세상에 나쁜 아이와 나쁜 부모가 있겠는가? 저마다 자신의 철학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각각이 처한 상황과 상태가 다를 것이다. 어떤 단면만 보고 다른 이에 대한 평가절하나 판단을 하려는 의도는 없다. 내가 본 순간순간의 인상들이 우리 가족도 겪었던 그 경험 속에서 배운 교훈들을 다시 떠오르게 한 계기가 되어 쭉 의식의 흐름대로 썼을 뿐이다. 모두가 각자 최선을 다하는 방법과 수준이 서로 다를 뿐이다. 과열된 교육열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교육열을 올리는 학부모도 열심히 하는 아이, 누구도 틀리지 않다. 심지어 그걸 수단 삼아 이용하는 이들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에 대한 것도 그들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이들이 판단할 몫이다. 난 우리 아이들이 그 길을 걷다 뒤를 돌아보고 행복하게 추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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