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은 정말 다사다난했다. 매크로 환경도 바닥을 뚫고 지하까지 갔지만 마이크로하게도 힘든 상황들이 많이 펼쳐졌다. 조금 늦어졌지만 한 해를 돌아보며 정리를 좀 해보려고 한다. 여러 변화가 있었지만 가장 큰 파이를 차지하는 한 회사를 떠나는 과정만 담았다.
변화에 적응하고 생존하는 종이 가장 강한 종입니다.
어느 회사이든 PO에게 많은 임파워먼트를 준다해도 조직이 가고자 하는 방향에 얼라인이 맞추지 않고 각자 마음대로 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호흡을 맞춘 내 리더가 퇴사를 했다. 사실 그정도인가? 라는 생각을 할 만큼 완전한 공감을 하지 못했던 부분도 있었다. 여러가지 이유로 나는 새롭게 변화를 온 몸으로 받아보기로 했다. 호흡이 잘 맞았지만, 그와 기존의 구성원들이 일하는 방식이나 방향이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이는 어떤 전략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야 나도 경험과 식견, 지혜가 더 생길 것이라고 기대했다.
1분기가 지나도록 나는 누구와 방향성을 맞추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미루는 리더들만 있고 원래 하던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참다참다 누가 됐든 이야기를 하자며 나의 계획들을 말했을 때 그것에 대한 피드백을 명확하게 하는 이는 없었고, 내 기준에는 disagree도 없으니 agree는 아니더라도 실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 이마저도 나의 잘못이라는 피드백을 들었었는데, 여전히 모르겠다. 왜 내가 얼라인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지, 내가 기존의 계획대로 갈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궁금증보다 그냥 나의 책임으로 둔갑시켰다. 물론 그들의 피드백은 '우리'보다 '당신'에 포커싱된 피드백이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조직의 성장이 먼저라면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본질적인 문제를 파악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 피드백과 근거들은 추정만 존재할 뿐 설득적이지도, 논리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나의 선택은 고개 숙여 방향 정해달라고 지시를 해달라고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유는 분명하다. 내 계획과는 다른 일을 하고 있고 실패할 줄 알았다며(실제로 뭐가 성공이고 실패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저기 나와 팀의 신뢰자산을 비아냥과 깎아내림으로 소비시켜버리는 상황이 싫었다.
좋아요. 당신이 원하는 것들을 해볼게요. 무슨 일을 해볼까요?
첫번째 작업은 내가 여러가지의 리스트들을 읊고 그 중에 간택받는 일을 하는 구조였다. 서로 동의할 수 있는 일이니 가장 빠르고 쉬운 선택이었다. 물론 작업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우리 팀은 드래곤볼 모으듯 흩어진 기능들을 한데 합쳐야 했고, 합쳐진 기능을 더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해 새로운 기능들을 넣었다. 팀이 하던 업무 방식에서 가장 큰 변화가 있던 시기었는데, 그 이유도 우리 팀은 너무 작은 단위로 일을 하고 있어서 임팩트가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는 피드백 때문이었다. 1~2주 배포 주기를 갖던 팀이 4주라는 텀을 갖게 되자 제품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당연히 왜 느려졌냐는 피드백이 돌아왔다. 난 이 피드백에 따라 해보기로 했을 때 팀원들 모두가 예견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끝까지 해내는 것에만 집중했다. MVP가 아니라 MLP라고 했었으니까 나도 그 기준에 충실했다.
4주 뒤 새로운 기능이 배포되자 지표들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이 기능 때문이야는 모른다. 왜냐면 AB테스트도 모두 중단되어 전후 비교를 해야했지만 그 시점에 마케팅 프로모션이 새로운 기능에 포커스되어 변별력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난 의문을 던졌다. 지표의 변화를 보며 전후비교를 해야할 만큼 명확한 근거를 모으고 싶은데 왜 AB테스트에 대해서는 신뢰도를 낮게 보는지, 오히려 새로운 기능은 진입점이 단조로워서 AB테스트를 하기 더 쉽다고 생각했었는데, 조직 차원에서 데이터 분석가를 모두 다른 곳에 배치하던 시점이라 내겐 데이터를 볼 수 있는 환경이 사라지고 있었다. 물론 AB테스트가 PO/PM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힘을 붙이려고 한다 라고 하는 부분에서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팀에게 AB테스트는 다음 더 높은 도전에 대한 지표를 잡는 중요한 기점 지표이기 때문에 사라진 상황에서 분석적인 걸 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사용자 피드백을 수집해서 1주 뒤 바로 업데이트, 1주 뒤 다음 업데이트가 연속적으로 진행됐다.
애초에 안정적인 제품을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수정을 통한 지표 개선을 하기 보다는 다음 일감을 찾아나서기로 했다. 더 솔직하게는 개선시킬 기능 단위의 지표도 없는 상태였으니까 의미가 없었다고 하는게 맞겠다.
왜 다시 느려져요?
시간이 조금 흐르자 또 다시 피드백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연히 느려진다는 말이었다. 애초에 우린 빠르게 실험하고 지표의 변화를 찔러보는 조직이 아닌 목표를 정하고 그 그림에 도달할 때까지 묵묵히 나아가자는 기조였는데 잊을만 하면 느리다는 피드백을 들었다. 당시 우리팀이 하던 일은 영상 플레이어에 새로운 편의기능들을 넣어서 더 사용성을 높이는 일이었다. 하나의 기능을 추가하려고 해도 기술 복잡도가 높아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이 일을 해놓아야만 했다. 3주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느려졌다는 피드백에 당황했다. 당시 이 작업은 규모도 많이 컸고 팀 내에서도 더 잘해내려고 치열한 토의를 하고 있던 중이라서 어떤 걸 보고 느리다고 한 것인지 식별이 불가능했다. 그러던 중 함께 일하는 동료에 대한 평가들이 오고가기 시작했다. 그 일의 DRI도 아니고, 같이 일하는 동료도 아닌 이가 외부에서 협업 능력에 대해 평가하기 시작했다. 불안감이 들었던 것은 여기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애초에 이 피드백의 목적은 다른 것에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어쨋든 계속 작업은 해야 했기에 당사자에게는 전하지 않고 일단 응원하고 해내기 위해 노력했다.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자 본격적인 압박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안식월에 들어가는 당사자의 휴가를 반려하고 상황 파악도 못하는 것 같다며 비판이 시작됐다. 신뢰를 잃었으니 그랬겠지만, 어떤 부분에서 신뢰를 잃은 것이고 왜 지금 성과를 내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무자비한 결정이 필요했는지 모르겠으나, 워낙 비즈니스적인 상황이 좋지 않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에 어느정도 이해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나는 타인이 타인에게 말한 팀에 대한 평가를 통해서 들어야만 했다.
속도가 느려요.
이번엔 내 질문이 시작됐다. 속력이 느리다는 건지 방향성이 잘못 됐다는 건지 어떤 걸 보고 속도가 느리다는 건지, 속도의 빠르고 느림은 체감상 상대적일텐데 그 상대는 누구인지 물었다. 이상하게 내둘러 표현되는 것들에서 힌트를 찾아야 했고 그 힌트 속에서 내가 알 수 있었던 건 상대적으로 속력이 느린 것 같다는 느낌과 그걸 언급한 이가 상대적인 비교 대상이던 다른 팀의 리드라는 것을 알게 됐다. 재밌었다. 전쟁터에서 적군과 싸울 준비를 하는데 옆 부대에서 우리 부대를 헐뜯고 비난하는 것이었다. 피아식별이 안되는 상황이 꼭 동토를 당하고 있는 듯 했다. 심지어 적군의 계략도 아닌데 이럴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렇게 시간이 1~2주 정도 흘러 피드백을 듣던 동료 한명이 퇴사를 선언하고 결정했다. 충격적이었던 건 이미 팀원 중 쓸모가 있는 동료와 쓸모가 없는 동료가 구분되어 전환 배치 안이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가 리드하는 조직이고 우리 조직이 제품이 어떤 상황이라 어떤 조치가 필요하다는 사전 논의 없이 결정된 것들을 통보받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이들은 나를 리더로서 존중하지 않는구나. 애초에 결정된게 있고 그 결정된 안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쏟아진 수많은 피드백들을 내가 눈치 없이 해내겠다고 한 거였구나.
이런 상황을 눈치도 못채고 나는 전임 리더에게 찾아가 고민 상담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셨을까? 지혜를 구하고 싶다며 찾은 내게 그 분은 침묵했고, 함께 일했던 동료들과 팀을 걱정했다. 논리적인 대화, 제대로 일하고 승패와 상관없이 결과에 승복하고 다시 도전하는 시장에서의 충돌들이 사라진 상태에서 나는 이미 의욕을 잃을 만큼 잃었고, 그는 내게 다음 계획을 물었다.
맞지 않는 길에 지쳤어요. 아마 떠날 것 같아요.
그럼 조직은 어떻게 되냐며 조직부터 걱정하던 그는 그래서 내게 다음 길은 어떤걸 찾냐며 물었다. 기왕이면 더 큰 조직, 네임밸류가 있는 곳에서 커리어 피크를 한번 찍으면 어떻겠냐고 했다. 내 대답은 그것도 고려해보겠지만, 너무 염증을 느껴서 고민이 크다고 대답했다. 난 타고난 직장인은 아닌 것 같다. 팔로워십이 강하지 않고 리더십이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10개월이 넘는 기간동안 내 리더십은 나 스스로도 의심이 될 만큼 위축됐다. 다만 지금은 쿨하고 멋진 제품보다 내 삶의 궤적에서 도움이 되고, 무언갈 배울 수 있는 제품을 만들며 마지막으로 프로덕트 가이로서의 내 능력을 발휘하고 싶다고 했다. 시장에 대한 통찰도 얻고 은퇴하고도 내가 나의 길을 찾아가는데에 도움이 되어 잘 만들고 싶은 그런 제품을 찾아볼 것 같은데, 아직 깊게 고민은 못해봤다고 했다.
만약 그런 고민이라면 본인이 있는 회사도 후보군에 올려달라고 했다. 약간 갑작스러운 듯 뚜렷한 제안을 하진 못하셨지만 말만이라도 감사했다. 그리고 다음 날 회사에서는 매일 내게 생각해봤냐는 질문과 나의 대답을 요청했다. while return true 가 내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내 출근길을 바라보던 아내가 가족을 위해 버티는거냐고 울먹이며 물었다.
아니야. 아닌데.. 방법을 찾아봐야지.
고맙게도 다른 팀에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손 내민 리더에게 되물었다. 제가 할 수 있는게 있나요? 뭘 기대하시죠? 분명하고 짧고 단호하게 묻는 편이 더 상대에게 부담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다소 직설적인 화법은 논리가 없는 이에게는 당황과 무례하고 퉁명스럽다고 느껴지는 질문이지만, 논리가 명확한 이에게는 답하기 쉬운 질문이라 거침없이 던졌다. 역시나 꽤 오랜 시간 이 논리의 열거가 시작됐다. 나에 대한 동정심이 가장 컸다는 걸 알았고 다시 물었다.
제가 고민거리군요?
개인의 역량과는 별개로 조직 구성과 상황에 따라 애매한 상황이 되는 경우가 있다. 지금 내가 그런 것 같았다. 우리 팀을 비교하며 깎아내린 그 팀의 배포 내역은 우리 팀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문서화에 대해 나무라던 것치곤 문서는 한 줄도 안써져 있는 경우도 허다했다. 허무함이 밀려왔다. 원점보다 더 논리적이지 않은 상태로 가는 것은 퇴보라고 하지 않던가? 이것에 대해 내가 조직에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들은 진일보하고 있다고 믿으며 어떤 객관적인 것에 대해서도 비평 일색이며, 생각이 다른 것을 틀렸다고 하는 이들인 것을.. 그리고 지금 이렇게 전후 맥락 확인도 없이 팀을 난도질 하고 있고 난 그 칼에 깊은 상처를 받아버렸다. 그런 내게 조직을 위함을 요구하는 것, 어떤 피드백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했다. 내게 남은 건 제품에 대한 애정과 효율적이고 논리적으로 일하며 건강한 조직문화를 만들려던 동료들뿐이었다. 이후에도 수회에 걸쳐 내 보직과 팀에 대한 논의가 릴레이로 이어졌고, 결정이 여러번 바뀌고 설득이 오갔다.
저는 여기서 다른 길을 찾아볼게요
이제 떠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전에 만났던 리더의 소개로 나와 같은 직군의 사람들과 간단한 미팅도 해보니 그곳에는 훌륭한 사람들과 지금은 해야할 일이 많은 제품이 있었다. 게다가 내가 은퇴하고도 쓰게 될 혹은 쓰고 싶을 제품으로 만들 수 있었다. 제품과 이 팀이 하고자 하는 일에 공감했고 그 전달하고자 하는 가치의 수혜자가 미래의 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리더에게 이력서와 함께 약간은 긴 듯한 메세지를 보냈다.
경험이 좋았고, 재밌을 것 같다. 나도 그간 느끼고 달라진 점이 있고 ㅇㅇ님도 그런 것 같아서 더 기대된다.
저를 추천하시는게 ㅇㅇ님에게 해가 되는게 아니라면 호흡을 다시 한번 맞춰볼 수 있게 기회를 주실 수 있을까요?
결정된 것 아무것도 없이 이력서를 보낸 나는 다음 날 회사에 퇴사 선언을 했다. 갑작스럽게 원점으로 돌아간 듯 했지만 나의 결정에는 지금 이 논의와 혼란 속에 있는 팀원들이 더 이상 낭비되지 않도록 하고 싶었고,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아쉽다. 실망이다. 라는 말과는 달리 진행은 속전속결이었다. 더 시간을 길게 두진 않고 싶었지만 결과적으로 잘 마무리하는 것도 중요했기에 일주일 정도의 텀이 내게 주어졌고 최대한 많은 이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 와중에 1차 인터뷰가 잡혀 저녁에 인터뷰를 다녀오기도 했다.
정처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의 첫 월요일이 시작됐다. 평소처럼 첫째를 등교시키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애처로워하는 아내의 눈길이 기다리는 것 같아 쳐다보지도 않고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이력서를 다시 훑어보았다. 항상 내 삶을 돌아보는 일기처럼 정리하고 있던 이력서이지만 정돈되지 않은 문장들로 쓰여졌을까 걱정도 들었다. 사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얼어붙은 구직 시장에 내 멘탈도 얼어붙을까봐 그랬다. 그러던 중 메일함이 울렸다. 휴대폰 진동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했던 시기이다.
최종 인터뷰 일정을 잡고자 합니다.
다행히 1차도 무난하게 지나갔고 바로 그 주에 인터뷰를 보러 다녀왔다. 인터뷰 시작 전에 날 추천해준 리더에게 메세지를 남겼다. 오늘이 마지막 인터뷰인 듯 한데 마치고 잠깐 뵙고 갈 수 있을지 물었고, 인터뷰가 끝나니 회의실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인터뷰 어땠냐는 질문에 나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자신이 없었다거나 잘 못봤다는 느낌보다는 너무 꾸밈없이 내 이야기만 담백하게 한 걸까 싶었다. 남은 연차까지 소진되어 퇴사처리가 되는 날 합격 통보를 받았다. 바로 그 다음 주부터 일하고 싶었는데 조직 변경을 앞두고 있으니 일주일 뒤에 합류하는 편이 좋겠다는 제안을 들었다. 12월 9일, 내 다음 페이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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