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Sin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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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축구 최강자 자리를 놓고 늘 다퉈왔던 팀은 크게 이란, 한국, 일본으로 좁힐 수 있다. 세계 대회 기록으로 따지면 한국을 따라잡을 팀은 없지만 언제나 호랑이 군단을 '종이 호랑이'로 순식간에 끌어내리기도 했던 팀들이다. 물론 이 사이에 베트남과 오만 등에 패배한 경험도 있는 것 역시 문제가 되긴 하겠지만, 언제나 위협할 수 있는 팀들은 아니다. 여기에 최근 중동 무대가 새로운 오아시스처럼 대형 스타들이 향하며 그들의 축구 수준이 향상되고 있다는 점 역시 크게 위협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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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호주가 2005년 6월 오세아니아 축구연맹을 탈퇴하고 아시아 축구연맹으로 옮겨 2006년부터 AFA로 합류하며 아시아 축구 연맹 소속으로 뛰며 전통강호란 말은 사라지게 될 것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우리나라도 아시아 무대에서나 강했지 세계무대에서는 결국 아시아 수준이었던 팀이던게 사실이다. 그리고 그 반전의 계기는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처녀 출전한 대한민국 대표팀은 세계축구와의 현격한 실력차를 확인하게 된다. 6월 17일 취리히에서 헝가리를 상대로 열린 역사적인 한국의 월드컵 데뷔 무대에서 9대 0 패배를 기록했고, 이는 월드컵 역사에 아직도 최다 점수차 경기로 남아있다. 사흘 뒤 제네바에서 열린 터키와의 2차전이 열렸고, 헝가리전 패배에 주눅이 들어서인지 이번에도 7대 0 대패를 당한다. 

하지만 이 때도 한국에서는 축구에 대한 관심이 높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세계 무대에서 대형사고를 먼저 친 것은 북한이었다.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전에 관중석을 수놓았던 'AGAIN 1966' 이라는 말을 기억하는 팬들이 아직 많을 것이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를 우승후보 이탈리아와 하게된 북한은 박두익의 결승골로 8강에 진출 (당시엔 16강이 없고 조별 예선 후엔 바로 8강이었다.)했었다.

당시엔 파격적인 전술들을 들고 나왔던 북한은 사다리타기 전법을 통해 신체적 열세를 딛고 코너킥 등 헤딩상황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했었는데,  5,6명의 선수들이 나란히 골라인 근처에 서서 점프할때 같은 팀 선수들을 도와 더 높은 위치까지 도달하게끔 도와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전술이 실제로 골로 연결된 적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전술은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금지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마치 우리가 이탈리아를 무너뜨리고 '골든골'제도가 사라졌듯이 말이다.


 
 이후 우리나라는 대형 유망주들도 대거 등장하지만 대부분 제도와 혹사 덕에 이른 나이에 선수 생활을 접으며 아쉬움을 자아냈고, 그나마 남은 선수들도 많은 활약을 펼쳤지만 세계무대에서는 그 차이를 몸으로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특히 96아시아컵이 열리기 전까지 재밌는 경기는 만들었지만 결국 1승도 챙겨보지 못한 한국은 아시아에서만 호랑이라는 소리를 들어왔다.

그리고 2년 뒤, 1996년 UAE 두바이에서 열린 아시안컵에서 한국은 개최국 UAE와 쿠웨이트, 인도네시아와 함께 A조에 편성됐다. UAE와의 첫 경기에서 무승부를 거두며 불안한 출발을 보인 한국은 두 번째 경기 인도네시아 전을 4대 2로 승리하며 다시 살아나는 듯 했었다. 하지만 쿠웨이트와의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를 0대 2로 내주며 승점 4점으로 조 3위에 그치며 탈락의 위기에 놓이지만 불행중 다행으로 와일드카드에 턱걸이 하며 8강에 진출한다.

그리고 12월 16일 열린 8강전 이란전에서 한국은 전반전에 터진 김도훈과 신태용의 골로 2대 1로 앞서 나가며 드라마를 쓰는 듯 했다. 하지만 후반전 들어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며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인 한국은 알리 다에이에게만 무려 4골을 빼앗기며 2대 6으로 완패했다. 기록적인 참패 후 한국 축구팬들은 충격에 휩싸였고, 여론에 따라 당시 대표팀을 이끌던 박종환 감독은 경질됐다.

그리고 또 다시 2년 뒤 차범근 감독이 이끄는 국가대표팀은 98월드컵에서 세계무대에 도전한다. 멕시코 전에서 하석주의 그림같은 프리킥 골과 월드컵 최초 백태클 퇴장이라는 불명예를 동시에 안긴 경기이기도 한 이 경기 시작 전, 언론은 '멕시코가 1승 제물이며, 흥분 잘하는 특성을 이용하면 충분히 승리가 가능하다' 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흥분 하지 않고 침착한 플레이로 3대1로 역전에 성공한다.

당시 경기 하이라이트 ↓
 
그리고 본선 두번째 경기에서 네덜란드에게 5대0으로 참패하며 차범근 감독은 월드컵 도중 경질되는 상황에 이른다. 확실히 세계 무대를 느끼게 해줬던 월드컵이기도 하다. 하지만 5대0이란 숫자를 안겨준 히딩크를 2002년 월드컵 대표팀 감독직에 부르며 개혁을 시작한 국가대표팀은 전면적인 개선작업에 착수하지만 체코, 프랑스에게 5대0으로 연달아 패하며 히딩크의 별명은 '오대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경험이니 받아들이라고 했던 히딩크 감독은 월드컵 직전 친선경기에서 그 가능성을 보였고, 결국 4강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한동안 아시아 무대는 한국의 독무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국 축구에 놀란 세계는 들썩였고, 박지성을 비롯한 월드컵 4강의 핵심 주역들은 유럽 클럽들과 접촉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해외 무대 진출 이후 상승세를 타던 한국은 2010 동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 중국에게 3대0으로 패하며 '공한증'을 32년만에 처음으로 씻겨내주었다. 그리고 이어진 월드컵에서는 원정 첫 16강에 진출하며 세계 무대에서도 통할 만큼 충분히 발전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시작된 카타르의 '오일 머니'를 이용한 투자는 카타르 뿐만 아니라 중동 축구의 전체적인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게다가 이번엔 중국의 거대 사업가들까지 축구계에 뛰어들며 중국의 수준도 조만간 껑충 뛸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경기 침체와 자연 재해까지 겹치며 다소 주춤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예견했지만 역시 스포츠는 위기에서 더욱 빛이나는 것인지 한국을 3:0으로 무너뜨리며 '삿포로 참사'를 만들어냈다. '오만 쇼크'가 있었던 2003년부터 '방심'이라고만 치부하기엔 상상조차 못했던 결과들이 이어지며 위기설이 거론되는 것 또한 당연한 듯 보인다. 

2003년 움베르토 코엘류 감독이 이끈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팀이 10월 19일 열린 아시안컵 예선 베트남과의 원정경기에서 약체 베트남 국가대표팀에 0:1로 패한 뒤, 10월 21일 오만으로 건너 가서 또다시 오만 국가대표팀에 1대3으로 역전패를 당했다. 그리고 이 쇼크는 그 후에도 계속되는데, 2004년 3월 31일 2006독일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예선에서 몰디브와 0대0으로 비기며 결국 움베르토 코엘류 감독이 경질된다. 그 후, 2004년 10월 본프레레 감독이 이끈 국가대표팀은 레바논과 1대1 무승부를 기록해 자칫 월드컵 최종예선에도 오르지 못할 뻔한 위기도 있었다.

세계 무대가 평준화되고 이젠 각 대륙별 평준화도 가속화되고 있는 시점이다. 더 이상 '방심했다'라는 핑계는 팬들에게 먹히지 않는다. 전통 아시아 축구 강국 한국과 일본이 나란히 올림픽 본선 진출에 적신호가 켜져있는 상황에서 상대팀들에게 확실히 왜 아시아 '최강'이라고 불리는 지 일깨워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이 A대표팀에게도 이어져 최강희 감독의 지휘아래 쿠웨이트 전에서 대승을 거두며 브라질行 티켓까지 확보해 2012년 임진년의 시작을 밝게 해주길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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